E-07: 세 번째 인간
제8장. 두 번째 승객
빈 좌석은 사람이 앉기 전에 먼저 내려앉았다.
검은 창문에 남은 손바닥 자국은 민재의 손보다 작았다.
그는 손을 들어 자국 위에 겹쳐 보았다.
손가락 두 마디만큼 차이가 났다. 아이의 손이었다.
차가운 유리 너머에는 터널도 선로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과 빈 객실만 검은 표면에 떠 있었다.
민재가 손을 떼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작은 손자국이 유리 안쪽에서 천천히 미끄러졌다.
아래로 한 뼘.
그리고 오른쪽으로 조금.
누군가 반대편에서 손을 짚은 채 걸어가는 것처럼.
민재는 자국을 따라 객실 끝까지 갔다. 손자국은 출입문 옆의 은색 벽에서 멈췄다.
그 자리에 가느다란 푸른 선이 생겼다.
선은 위에서 아래로 곧게 그어졌다. 색연필로 금속 위를 눌러 그은 듯 가장자리에 푸른 가루가 번져 있었다.
민재가 손끝으로 문질렀다.
가루가 손가락에 묻었다.

그 순간 객실의 조명이 돌아왔다.
출입문 위의 노선 표시에서 흰 점이 첫 번째 표식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꽃잎처럼 생긴 작은 타원.
열차가 흔들렸다.
가속도 감속도 아니었다. 바닥의 수평이 아주 잠깐 뒤집힌 것처럼 몸이 위로 떠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꽃향기가 짙어졌다.
민재는 숨을 참았다. 향기 아래에 소독약과 젖은 금속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안내 방송이 나왔다.
경계 통과 중입니다. 승객은 현재 위치를 유지하십시오.
여자의 목소리였다.
감정 없이 부드러운, 어느 역에서나 들을 수 있는 안내 음성.
그런데 문장이 끝난 뒤에도 스피커에서 숨소리가 남았다.
짧고 불규칙한 호흡.
누군가 뛰어온 뒤 숨을 고르는 것 같았다.
민재는 천장의 스피커를 올려다보았다.
“들립니까?”
잡음만 돌아왔다.
치직.
그 사이로 아주 작은 목소리가 흘렀다.
“여기에 문이 있다.”
민재는 출입문 앞으로 다가갔다.
“어디에 있습니까?”
대답은 없었다.
대신 조금 전 생긴 푸른 선 옆에 두 번째 선이 그어졌다.
그리고 세 번째.
툭. 툭. 툭.
벽 안쪽에서 같은 횟수의 진동이 전해졌다.
민재는 주먹으로 벽을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열차의 모든 손잡이가 동시에 흔들렸다.
흰 점이 첫 번째 표식을 빠져나오자 꽃향기가 사라졌다.
푸른 선도 더는 늘어나지 않았다.
민재는 객실을 살폈다.
비상통화 장치는 출입문 오른쪽에 있었다. 붉은 버튼과 작은 스피커, 투명 덮개가 달린 평범한 장치였다.
덮개를 열고 버튼을 눌렀다.
표시등이 세 번 깜빡였다.
곧 김도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민재 씨. 열차를 정지시키겠습니다.”
“먼저 설명하십시오.”
“열차가 멈추면 문이 열립니다. 내리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방금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안내 방송입니다.”
“안내 방송이 문을 찾고 있습니까?”
김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재는 벽의 푸른 선을 내려다보았다.
“이 열차에 나 말고 누가 있습니까?”
“현재 객실의 승객은 한 명입니다.”
“객실이 아니라 열차 전체를 물었습니다.”
“이 열차는 한 량입니다.”
“그럼 창문을 두드린 아이는 어디 있죠?”
스피커에서 낮은 잡음이 길게 이어졌다.
김도윤의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통화 장치 아래에는 비상용 망치가 들어갈 만한 직사각형 덮개가 있었다. 손잡이는 없고 모서리에 나사 네 개만 박혀 있었다.
민재는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에는 신분증도 카드도 없었다. 동전 하나만 들어 있었다.
동전에는 숫자도 인물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가운데가 네모나게 뚫려 있었다.
민재는 동전 끝을 나사 홈에 끼웠다. 크기가 정확히 맞았다.
첫 번째 나사를 풀었다.
열차의 속도가 조금 줄었다.
두 번째 나사를 풀자 조명이 어두워졌다.
세 번째 나사를 돌리자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승객이 임의로 경계를 변경하고 있습니다.
민재는 네 번째 나사까지 풀었다.
덮개 뒤에는 비상용 망치가 없었다.
가느다란 전선 세 묶음이 위아래로 뻗어 있었다. 흰색, 회색, 검은색.
각 묶음 옆에는 작은 표시가 인쇄돼 있었다.
꽃잎 모양의 타원.
가운데가 빈 네모.
끝이 갈라진 검은 원.
세 묶음은 서로 닿지 않은 채 한 개의 투명한 상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상자 표면에는 글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민재가 손을 대자 안쪽에서 흰 글자가 떠올랐다.
대조 중 · 1 / 3
민재가 손을 떼었다.
글자가 사라졌다.
무엇을 대조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열차의 위치라면 세 구간 중 하나라는 뜻일 수 있었다. 그러나 ‘중’이라는 표현은 이동보다 검사를 떠올리게 했다.
민재는 흰색 전선 묶음의 연결부를 눌렀다.
열차가 멈췄다.
바퀴가 마찰하는 소리는 없었다.
움직이던 풍경이 없었으므로 정말 멈춘 것인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손잡이의 흔들림이 그쳤다.
출입문 위의 흰 점은 첫 번째 표식과 두 번째 표식 사이에 서 있었다.
안내음이 울렸다.
문이 열렸다.
승강장은 없었다.
문 바로 앞에 폭이 좁은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벽과 바닥은 경계가 보이지 않을 만큼 희었고 천장에는 조명이 없었다.
민재는 김도윤의 말을 떠올렸다.
문이 열려도 내리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그는 열차에서 내렸다.
발을 딛는 순간 통로 바닥에 푸른빛이 한 번 번졌다. 객실 벽에 그어진 선과 같은 색이었다.
민재가 돌아서자 문이 닫혔다.
은빛 열차는 출발하지 않았다. 통로와 맞닿은 채 닫힌 문만 보여주었다.
민재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현재 시각은 06시 55분이었다.
열차에 오른 뒤 흐르기 시작했던 시간이 다시 멈춰 있었다.
통로의 왼쪽에서는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오른쪽에서는 불길이 무언가를 삼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민재는 왼쪽으로 걸었다.
스물네 걸음을 옮기자 벽에 작은 네모가 나타났다.
가운데가 비어 있는 표식이었다.
그 아래에는 손바닥만 한 금속판이 붙어 있었다. 민재가 누르자 표면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치직.
이번에는 여자의 목소리가 더 가까이 들렸다.
“내 기억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이죠?”
민재는 금속판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제 말이 들립니까?”
“……누구의 것이죠?”
같은 문장이 같은 높낮이로 반복됐다.
녹음된 안내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세 번째 반복이 시작되기 직전, 여자가 아주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저는 강민재입니다.”
잡음이 멎었다.
통로의 빛이 한 번 흔들렸다.
벽 반대편에서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리가 났다.
사각.
사각.
푸른 선 하나가 금속판 위에 나타났다.
민재는 숨을 죽였다.
여자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중앙으로.”
이번에는 반복되지 않았다.
민재가 금속판을 다시 눌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뒤에서 열차의 문이 열렸다.
객실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하지만 민재가 내리기 전과 같지는 않았다.
맞은편 좌석 한가운데가 아래로 눌려 있었다.
누군가 앉아 있는 만큼.
회색 좌석의 인조가죽이 팽팽하게 당겨졌고, 등받이에도 보이지 않는 어깨 두 개가 기댄 모양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민재는 문 앞에 선 채 안을 바라보았다.
“누가 있습니까?”
눌린 좌석은 움직이지 않았다.
문이 닫히기 전의 안내음이 울렸다.
민재는 객실에 올라탔다.
그가 맞은편 좌석에서 가장 먼 자리에 앉자 문이 닫혔다.
열차가 다시 움직였다.
출입문 위 노선 표시에서 흰 점이 두 번째 표식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운데가 비어 있는 네모.
그 아래에 없던 숫자가 나타났다.
현재 승객
2
민재는 숫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맞은편 창문이 하얗게 흐려졌다.
바깥에서 김이 서린 것이 아니었다. 따뜻한 숨이 객실 안쪽 유리에 닿아 생긴 흔적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흐린 유리 위를 움직였다.
글자가 한 획씩 나타났다.
당신도 아이를 찾고 있나요?
민재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아이가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결혼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마흔한 살이라는 나이와 출근 시간, 회의 전 캔커피를 사는 습관은 남아 있는데 집으로 돌아간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
집의 현관도.
식탁도.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의 얼굴도.
“모릅니다.”
민재가 말했다.
유리의 글자가 지워졌다.
잠시 뒤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모른다고 말하면 빼앗아 갈 수 없어요.
눌려 있던 좌석이 천천히 원래 모양으로 돌아왔다.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처럼.
바닥에 가느다란 푸른 선이 생겼다. 선은 맞은편 좌석에서 출입문까지 이어졌다.
열차가 두 번째 표식 안으로 들어갔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화면의 시각은 06시 56분으로 바뀌어 있었다.
배터리는 59퍼센트.
발신번호 없는 새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두 번째 승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민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노선 표시의 숫자는 여전히 2였다.
검은 창문에는 그의 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민재의 바로 옆자리에, 흰옷을 입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민재가 옆을 돌아보았다.
좌석은 비어 있었다.
다시 창문을 보았을 때 여자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부러진 파란색 색연필이 들려 있었다.

여자가 창문 속에서 고개를 돌렸다.
민재를 본 것이 아니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재의 등 뒤에서 아이가 속삭였다.
“이번에는 엄마가 먼저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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