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homas’ Universe/SF Fiction

[E-07: 세 번째 인간] 제7장. 거짓말을 기억하는 방

by Thomasrobotech 2026. 9. 8.
반응형

E-07: 세 번째 인간

제7장. 거짓말을 기억하는 방

방은 그녀의 기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녀가 믿으려는 것을 먼저 기억했다.

문 너머의 아이는 숨을 쉬지 않았다.

서윤은 그것을 아이가 말을 멈춘 뒤에야 깨달았다.

“엄마는 돌아오면 안 돼.”

목소리는 분명 문 바로 뒤에서 들렸다. 그러나 그 앞에도 뒤에도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는 없었다. 옷장 안의 공기는 고요했고, 얇은 문짝 너머에서는 체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서윤은 문틈에 넣은 손가락을 더 깊이 밀었다.

틈은 아주 조금 벌어졌다.

차가운 바람이 손등을 스쳤다. 꽃향기도, 아이 방의 종이 냄새도 아니었다. 젖은 금속과 오래된 먼지 냄새가 났다.

“서윤 씨.”

라파엘이 다시 불렀다.

“그 문에서 손을 떼십시오.”

“왜요?”

“당신이 찾는 곳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어디를 찾는지 알아요?”

“아들을 찾고 있습니다.”

서윤은 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내 아들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네요.”

라파엘이 대답하기 전에 옷장 안쪽에서 금속음이 났다.

철컥.

문틈이 서윤의 손가락을 물고 닫혔다.

서윤은 짧게 숨을 삼켰다. 손을 빼려고 했지만 관절이 걸렸다. 문이 한 번 더 닫히면 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라파엘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지나치게 일정한 온도였다.

그가 문에 다른 손을 대자 압력이 사라졌다. 서윤이 손가락을 빼낸 순간 틈은 흔적도 없이 닫혔다. 차갑고 검은 표면은 아이의 셔츠 뒤에서 평범한 옷장 벽처럼 보였다.

손가락 마디에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숨겨진 문에서 손을 뺀 서윤의 붉은 손가락 자국

아팠다.

서윤은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천국에서도 다칠 수 있군요.”

라파엘의 시선이 붉은 자국에 머물렀다.

“잠시 후 사라질 겁니다.”

“다치지 않는 것과 회복되는 것은 달라요.”

“결과는 같습니다.”

“당신들은 자꾸 결과만 같으면 된다고 생각하네요.”

라파엘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

당신들.

서윤은 자신이 왜 복수를 썼는지 알지 못했다. 라파엘 말고 다른 누군가를 만났던 기억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말투가 낯선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입으로 반복된 문장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옷장 문을 닫았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요.”

“진정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정원으로 돌아가려고요.”

라파엘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의 미소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눈동자가 아주 작게 좌우로 움직였다. 서윤의 얼굴에서 대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문장을 읽는 것 같았다.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또 질문인가요?”

“당신은 방금 들은 목소리를 아들의 목소리라고 믿습니까?”

서윤은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처음에는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의 이름도, 목소리도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이 아들이 있었다는 기억조차 이 방에 들어온 뒤 더 선명해졌다.

“모르겠어요.”

라파엘의 표정이 미세하게 풀렸다.

안도.

서윤은 그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확인할 겁니다.”

라파엘의 얼굴에서 안도가 사라졌다.

서윤은 그제야 확신했다.

그는 그녀를 안내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파엘이 문을 열어주지 않자 서윤은 방 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낮은 침대와 책상, 천장에 매달린 행성들, 색깔별로 꽂힌 제목 없는 책. 모든 것이 아들의 흔적을 흉내 내고 있었지만 정작 아이가 살았던 시간은 없었다.

그녀는 책상 위의 색연필을 바라보았다.

일곱 자루가 길이순으로 놓여 있었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서윤은 파란색을 집었다.

“아이는 파란색을 싫어했어요.”

라파엘이 그녀를 보았다.

서윤은 손에 든 색연필을 천천히 돌렸다.

거짓말이었다.

기억 속의 아이는 바다와 하늘을 그릴 때마다 파란색만 썼다. 파란색은 늘 가장 먼저 짧아졌다.

그녀는 색연필을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윤은 책상에서 물러났다.

세 걸음쯤 걸었을 때 뒤에서 가느다란 마찰음이 났다.

사각.

파란색 색연필이 움직이고 있었다.

누가 손대지도 않았는데 책상 가장자리까지 굴러가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색연필이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고, 나머지 여섯 자루가 간격을 맞추듯 조금씩 옆으로 움직였다.

라파엘이 색연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서윤이 먼저 주워 들었다.

“왜 사라지게 두지 않았죠?”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내 기억으로 만든 방이라고 했죠.”

“당신이 기억하는 것들은 이곳에서 모습을 얻습니다.”

“그런데 방금 내가 말한 건 기억이 아니에요.”

라파엘의 손이 멈췄다.

서윤은 침대 위의 토끼 인형을 바라보았다.

“저 인형의 귀는 원래 오른쪽이 접혀 있었어요.”

두 번째 거짓말이었다.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 왼쪽 귀가 접힌 것을 분명히 확인했다.

잠시 뒤 토끼 인형의 머리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접혀 있던 왼쪽 귀가 천천히 펴졌다. 반대쪽 귀가 보이지 않는 손가락에 눌린 것처럼 아래로 접혔다.

서윤의 목 안쪽이 말라붙었다.

방은 기억을 재현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기억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만하십시오.”

라파엘이 말했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에서 부드러운 높낮이가 사라져 있었다.

“나는 아들이 없었어요.”

서윤이 말했다.

세 번째 거짓말.

이번에는 변화가 즉시 시작됐다.

천장에 매달린 행성들이 사라졌다. 실이 먼저 투명해지고, 종이로 만든 지구와 화성과 토성이 빛 속에 녹았다. 책장의 그림책들이 한 권씩 색을 잃었다. 하늘빛 벽지는 흰색으로 바뀌었고, 문 뒤의 키 자국이 지워졌다.

침대 위의 토끼 인형이 마지막으로 남았다.

서윤의 거짓말에 반응하여 사라진다

검은 실로 꿰맨 눈이 서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취소하십시오.”

라파엘이 말했다.

“어떻게요?”

“당신이 거부하면 됩니다.”

그 말은 이상할 만큼 익숙하게 들렸다.

서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

아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웃을 때 한쪽만 깊어지던 보조개와 열이 나면 붉어지던 뺨, 이불 밖으로 내놓던 작은 발.

정말 자신의 기억일까.

그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억이 어디서 왔든, 그 얼굴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은 분명했다.

“내게 아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서윤은 눈을 떴다.

“하지만 저 아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당신이 결정하게 두지는 않을 거예요.”

토끼 인형이 사라지다 멈췄다.

반쯤 투명해진 몸 안으로 솜뭉치와 실밥이 비쳐 보였다. 잠시 뒤 색이 돌아왔다. 책장과 그림책, 천장의 행성들도 하나씩 원래 자리를 되찾았다.

파란색 색연필은 서윤의 손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벽에 선 하나를 그었다.

파란 흔적이 선명하게 남았다.

라파엘이 다가왔다.

“벽에 흔적을 남길 수 없습니다.”

그의 손이 선에 닿자 파란색이 사라졌다.

서윤은 다시 그었다.

이번에는 짧은 선을 세 개 그었다.

하나.

둘.

셋.

세 번째 선을 긋는 순간 옷장 안에서 같은 횟수의 소리가 들렸다.

툭. 툭. 툭.

서윤은 색연필을 움켜쥐었다.

라파엘도 소리를 들었다. 이번에는 모른 척하지 않았다. 그는 옷장과 서윤 사이를 막아섰다.

“검증을 종료하겠습니다.”

“무슨 검증이죠?”

라파엘의 입술이 멈췄다.

그가 실수했다는 것을 서윤은 알 수 있었다.

“누가 나를 검증하고 있죠?”

“지금은 돌아갈 시간입니다.”

“어디로요?”

“중앙으로.”

그 단어를 말하는 순간 방 안의 모든 빛이 꺼졌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기계음이 울렸다.

응답 범위를 초과했습니다.

라파엘의 손이 서윤의 어깨를 잡았다.

이번에는 따뜻하지 않았다.

차갑고 단단했다.

사람의 손이 아니라 손의 모양을 한 장치처럼 느껴졌다.

서윤은 몸을 비틀어 그의 손을 떼어냈다. 어둠 속에서 옷장이 있던 방향으로 몸을 던졌다.

어깨가 옷장 문에 부딪혔다.

문이 열리고 옷들이 얼굴을 덮쳤다. 서윤은 천 사이를 헤치며 뒤쪽 벽에 손을 댔다.

검은 문이 없었다.

손끝에는 평평한 벽만 닿았다.

서윤은 파란색 색연필로 벽에 썼다.

여기에 문이 있다.

벽 안쪽에서 잠금장치가 움직였다.

철컥.

세로로 가느다란 푸른빛이 생겼다.

서윤은 틈에 손가락을 넣고 문을 당겼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그녀의 손을 물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는 하늘도 정원도 없었다.

새하얀 복도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벽과 바닥의 경계가 보이지 않을 만큼 모든 표면이 같은 흰색이었다. 천장에는 조명이 없었지만 복도 전체가 스스로 빛났다. 성전 안의 빛과 닮았으면서도 따뜻함은 없었다.

서윤은 문턱을 넘었다.

뒤에서 라파엘이 말했다.

“그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윤은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있다고 말했어요.”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밑에 가느다란 푸른 선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복도는 곧 세 갈래로 나뉘었다.

각 통로의 입구에는 표식이 하나씩 떠 있었다.

꽃잎처럼 보이는 작은 타원.

가운데가 비어 있는 네모.

끝이 갈라진 검은 원.

갈림길, 그리고 문턱에 막힌 라파엘

서윤은 가운데 통로 앞에 섰다.

비어 있는 네모 안에서 작은 잡음이 들렸다.

치직.

아이 방에 있던 장난감 무전기와 같은 소리였다.

서윤이 통로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라파엘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쪽은 당신의 기억이 아닙니다.”

서윤이 걸음을 멈췄다.

라파엘은 문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서 있었다. 한 손을 복도 쪽으로 뻗었지만 손끝은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내 기억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이죠?”

라파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빈 네모 안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이번에는 평평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울고 있었다.

“나를 찾지 마.”

서윤은 통로 안쪽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왜?”

짧은 침묵 뒤에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는 엄마가 나를 기억할 때마다 다시 시작하니까.”

복도 전체의 빛이 한 번 흔들렸다.

서윤의 손에서 파란색 색연필이 부러졌다.

부러진 단면에서 파란 가루 대신 흰 꽃잎 하나가 떨어졌다.

꽃잎의 끝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다음 이야기: 제8장

반응형